창가의 여유김여환 | 의학박사, 가정의학과 전문의

창가의 여유

코로나 19와의 싸움,
이렇게 이겨냈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꿈꾸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 짐 데이터(미래학자, 하와이대 명예교수)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꿈꾸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 짐 데이터(미래학자, 하와이대 명예교수)

나는 대체로 겁이 없다. 아무리 가냘파보여도 일단 의사가운을 걸치면, 굵은 팔뚝을 가진 남자가 눈앞에서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려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의대 공부와 응급실 수련을 하다 보면 ‘바이탈 사인(활력징후. 사람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혈압, 호흡, 체온 등의 측정치)’이 흔들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호들갑 떨며 살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터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나는 천 명 이상의 사망선언을 한 의사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다. 31번 환자가 입원했던 한방병원이 우리 집 코앞에 있었고, 코로나 청정, 대구에서 31번을 확진하는 바람에 졸지에 밀접접촉자가 된 의사도 잘 아는 동네 사람이었다. 또 아들이 근무하는 병원의 간호사가 신천지교인인 확진자임이 밝혀졌고, 그녀와 함께 근무한 호흡기내과 전공의도 확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무서웠다. 대구는 의과대학이 네 곳이나 될 정도로 의료의 질이 높다. 그런 곳에서 의료진과 병실이 턱없이 부족해서 수천 명이 입원을 대기하고 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데이터와 통계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의학이 데이터가 없는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를 어떻게 통제해나갈지도 두려웠다.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소위 ‘몸빵’이라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의료봉사였다.

코로나와의 사투

코로나19 의료봉사를 하려면 레벨 D 보호복을 입는 것부터 숙지해야 했다.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받았다. 봉사를 하면서 감염이 될까 두려워서 시끌벅적한 코로나 거점 사무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그 영상을 세 번이나 봤다. 원리는 간단했다. 수술복은 입을 때는 입는 것을 잘해야 하지만 보호복은 벗는 것을 잘해야 한다. 우주복같이 생긴 것을 안쪽에서 돌돌 말아 벗어놓고 곧장 샤워실로 달려가면, 코로나가 설사 조금 묻어 있더라도 몸속으로 들어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봉사하는 한 달 내내 코로나 증후군에 시달려야만 했다. 콧물이 조금 나거나 목만 칼칼해도 ‘코로나가 아닐까?’라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봉사한 동산병원은 세련된 호텔 분위기가 나는 요즘의 대형병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120년이나 된 곳이라 무선인터넷이나 샤워실 등의 편의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고, 병실의 페인트도 너덜너덜 벗겨지고 전등마저 희미했다. 그러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의료장비만은 완벽했다. 침대마다 산소를 쓸 수 있었고, 중환자실이나 CT실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구시 한복판에 세워진 낡고 허름한 골동품 같은 이 병원이 절망에 빠진 우리를 구한 것 같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2개의 자동문을 통과하면 좀비영화 촬영소 같이 썰렁한 코로나 병실이 나온다. 폐렴환자는 수시로 가슴 청진도 하고 가습기도 틀어주는 것이 정석인데 코로나19 폐렴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특별한 치료약이 없고 가족들의 면회도 당연히 금지다. 어둡고 칙칙한 병동 한구석에서 홀로 코로나와 싸워야 한다.

마음의 면역 시스템도 작동해야 한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시간이 지나면 급속도로 우울해지거나 울화통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폐쇄병동에 갇힌 코로나 환자들은 담당 의사가 3평 남짓 작은 공간에 응급으로 마련한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각자의 전공을 내팽개친 채 밤낮으로 코로나 치료에만 집중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당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주치의에게 환자의 상태를 알려주는 의학적 회진뿐만 아니라, 손톱깎이나 빨래비누가 없다고 하면 사다주고 기침을 많이 해서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면 스트레칭 동작을 알려줬다. 베트남 출신의 젊은 엄마가 먼저 퇴원한 여덟 살 딸아이를 걱정하고 있으면 “내가 애들 키워봐서 아는데 아이들은 엄마 없으면 더 잘 먹고 더 잘 지낸다”라고 안심시켰다.

장숙자(66세, 가명)님은 목이 따끔거려 입원한 환자였다. 환자복 위에 목수건을 두르고 침상 식판을 책상삼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까치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림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다고 했지만 선이 살아 있었다. “좀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저는 선생님만 믿습니다” 하면서 보호복을 입은 내 모습도 그려주었다. 의사인 나도 이렇게 두려운데 환자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갑자기 맞닥뜨린 코로나 사태를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순박한 그림 속에서 한 가닥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분례(69세, 가명)님은 이번 일로 할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요양병원에서 간병하다가 할아버지한테서 옮았다. 할아버지는 콧줄을 달고 산소도 6리터나 쓰고 있을 만큼 위중했지만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그래서 부부가 2인실을 썼다. 코로나 환자인 박여사가 코로나 환자인 할아버지를 돌봤다. 어느 날 할아버지 침대가 비워졌다. 박여사는 할아버지가 어제 새벽에 떠났고, 화장을 해서 안방 경대 위에 모셔놓았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화상전화를 걸어 함께 임종을 지켰으니 여한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코로나에 걸리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내가 안 걸렸으면 혼자서 쓸쓸히 임종을 맞이했을 텐데”라며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정성스럽게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에도 잘 살아간다. 코로나 환자가 줄어 병실을 정리하면서 박여사는 다른 젊은 환자와 함께 쓰는 방으로 배정받았다. 그녀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쥐포 세 마리를 들고 있었다. 옆방에서 회진하고 있는 N95 마스크를 한 나에게도 냄새가 솔솔 나는 것을 보면, 코로나 병동 전체에 콤콤한 쥐포 냄새 그리고 사람 살아가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코로나 19를 이긴다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면역 시스템도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어떤 사람은 아무 증상 없이 지나고, 어떤 사람한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 천의 얼굴을 가졌다. 문제는 의사도 아직 그 정체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48세, 김간호사는 환자의 가래를 뽑아주다가 코로나에 감염됐다. 젊고 건강해서 쉽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폐렴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중환자실에 일주일 있었다. “건강했던 내가 코로나 때문에 인공호흡기까지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라는 그녀의 음성은 꽉 잠겨 있었다. 기관 삽관을 하다가 긁힌 상처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 병도 없었던 그녀가 위험했다면 열 살 위인 나는 더 위험할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코로나19를 이기는 핵심은 의학적 접근

지구촌 곳곳에 퍼져있는 코로나19를 이기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수에 좋은 음식으로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많이 먹는 지중해 식단이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19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이탈리아 사태를 보면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음식으로 되는 병이 있고, 음식으로 안 되는 병이 있다. 코로나 틈새시장을 노린 식품 영양제나 근거 없는 약물에 더 이상은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를 이기는 핵심은 의학적 접근이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나오기까지는 불편하더라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등의 개인위생을 해야 한다. 코로나가 의심되면 주저하지 말고 검사를 받고 치료도 받아야 한다. ‘잘 넘어가겠지’ 하고 방심하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의사는 치료제가 없어도 김간호사처럼 상태가 나빠지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아프면 병원부터 가야 한다. 그 다음이 좋은 음식이고, 적당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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